대한민국의 정치인. 6선 관록의 정치인이자 친박의 대표 인물. 16대 국회 상반기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정치입문전
1943년 경상북도 영주군에서 태어났다. 영주초등학교, 영주중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중 대한민국 해병대에 입대하여 의무복무하였다. 졸업 후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였다.
리즈 시절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영주시-영풍군-봉화군-영양군 지역구에 민주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오한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4년 말 서석재, 박관용, 김찬우, 허경만, 김현규, 손정혁, 최수환 등과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같은 해 신한민주당 대변인이 되었다. 이민우 총재의 측근으로 활동했는데, 이민우 구상이 홍사덕의 아이디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찬종, 이철, 허경구, 조순형, 장기욱 등과 함께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양쪽 모두에 합류하지 아니한 채 야권 단일화를 주장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를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로 옮기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태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꼬마민주당에 합류하였고, 야당이 통합되면서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강남구 을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1].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의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이 때의 인연으로 김대중과 친분이 각별했으며, 한때는 동교동계 주변의 몇 안되는 영남 출신으로서 당 내에서 입지를 얻기도 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조순, 조세형, 이철 후보와 맞붙어 3등으로 낙선했다.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따라갔다가 바로 탈당하였다.[12]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4선 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지금 잠이 옵니까라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1997년 김영삼 정부의 정무제1장관에 임명되었다.
2000년 이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장기표와 함께 무지개연합이라는 신당 창당을 추진하다가, 뜬금없이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홍사덕 창당 선언 '작심 1주일'[13] 당시 통일부 장관을 맡고 싶다면서 새천년민주당 쪽과도 접촉했었다고 한다. 권노갑 증언 최종 발표 직전까지 계속 간을 보고 있었던 듯.
지역구를 오세훈에게 넘겨주고 전국구 2번을 배정받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나, 2001년 부의장직을 사임하고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다. 그러나 2002년 3월 7일자 중앙일보의 대의원 조사에서 지지율이 36.5%으로 53.1%인 이명박에게 크게 뒤처지는 결과가 나오자, 경선을 포기한다. 당시 "이명박이 당내 경선에서 대의원들을 상대로 지나치게 '물량' 공세를 펴는 것에 홍사덕이 크게 분노했다"는 얘기가 돌았고, 홍사덕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서울시장 선거에서 반드시 보여 주겠다"고 무소속 출마를 시사하기도 했으나 지도부의 만류로 무소속 출마는 실행되지 않았다.
2003년 한나라당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에 선출되어, 이라크 파병하면 한달 동안 사병으로 근무하겠다는 소리를 했다. 심지어 재입대를 하겠다며 입대 자원서를 제출했으나, 병무청 측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안된다'며 퇴짜.
2004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같다고 말하는 것은 김 전 대통령에게 큰 결례다.”며,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북한의 개혁 개방 자유화 민주화를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는데 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서는 이를 찾아볼 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은 통일 후에도 한반도에 주한미군이 필요하다는 말을 할 정도로 한미안보에 대해 확고한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노 대통령은 철학도 신념도 없이 한미 관계를 망가뜨렸다. 이라크 추가파병도 일본은 미국의 신뢰를 얻고 파병시간을 벌었으나, 우리 정부는 미국 기분을 상할대로 상하게 해놓고 보내는 시기는 일본과 같지 않느냐”고 당시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다.[14] 이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를 주도하고, 그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갑(현 일산동구) 지역구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한명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5년 재보궐선거에서 경기도 광주시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탈락하였다. 이에 불복하고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정진섭 후보에 밀려 또 낙선하였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고 #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하여 친박연대 후보로 대구광역시 서구 지역구에 출마, 당선된 후 한나라당에 복당하였다. 한편,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을 때 한국일보에 "DJ - '사회복지 원년'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선거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민주통합당 정세균 후보에 패하여 낙선하였다. 2013년 정치자금법위반죄로 벌금 300만원과 추징금 30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의장으로 있다가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으로 사의를 표했지만 수리되지 않았고, 정권교체로 물러날 때까지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직을 수행했다.[15] 2016년 북한 대홍수 사태에 대해 인도적 대북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2017년 정권교체 이후 완전히 정계를 은퇴했다.
사망
2018년 9월부터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2020년 6월 1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저서
그외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과는 서울사대부고 동기 동창이며,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있다. 몇몇 일화를 살펴봐도 절친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홍사덕 의원 빈소에 이건희 회장 명의로 조화가 전달되기도 했다. 기사 링크
10월 유신을 과도하게 칭송했다가 비판 받았다. 유신정권은 강성 수출을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는데,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은 인플레이션이 극심하던 시대였다.[16] 2차 석유파동으로 대한민국 자체가 아예 망할 뻔 했다. 대외적으로 수출 100억 달러니, 1000억 달러니 나왔지만, 실질적인 국민 소득이 매년 감소했다. 당장 보릿고개가 197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을 정도로 유통망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였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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