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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0. 9. 7.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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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본관은 공주(公州)로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본명보다 소월(素月, 흰 달)이라는 아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서양적인 시가 아닌 민족의 토속적인 한과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시를 써서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불린다.

그의 시를 보고 김소월을 현실에 대해 무감각한 예술가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1977년 발견된 그의 미발표 창작노트를 보면 가장으로서의 고된 삶[4]에 대한 고뇌와 일제 치하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적은 글이 보이는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인물이었다. 다만 그의 내성적인 성격과 짧은 활동기간으로 인해 현실을 비판하는 성격의 시를 발표할 여건이 안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시들로 대표되는 전성기 시절 후 발표하는 시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시어는 '집'과 '돈'이며 말년에는 시 쓰기를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취미활동으로 여겼다고 한다.

한국인 귀화 필기시험에 <진달래꽃>의 지은이가 누구냐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즉 김소월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라는 뜻으로도 보이니 이쯤이면 필수상식이다. 전 국민 애송시 1위 진달래꽃, 노래로 불려진 시가 가장 많은 시인, 교과서에 맨 처음으로 시가 등재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사진 하나 남기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기도 하다.[5]

더군다나 자신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영변의 약산은 현재는 북한 지역이라 분단 이래 남한(대한민국)에서는 마음대로 갈 수 없을 뿐더러 오늘날엔 다른 의미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소월이라는 말이 얼핏 여성 같이 들리는 데다가, 시들도 여성적인 느낌을 많이 주는 탓에 여류시인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꽤 많다. 특히 대놓고 '여성적 어조'라는 표현을 쓰는 탓에 더더욱 그렇다.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리의 외가에서 김성도(金性燾)와 장경숙(張景淑)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란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현 평안북도 곽산군 남단리)[6]이다.

1904년 아버지 김성도가 일본인들에게 폭행당해 정신이상자가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친척집에 음식을 싸들고 말을 타고 가던 길에, 철도일을 하던 일본인들이 이 음식을 뺏으려고 김성도에게 달려들어서 마구 구타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으나, 심한 폭행을 당한 트라우마로 PTSD에 시달리며 음식을 거부하며 집안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고 방 안에 틀여박혀 있다가 굶어 죽게 되었으며 어린 김소월은 이런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멸하는 양가감정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 후 김소월의 가족은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던 김소월의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한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직후인 1905년 훗날 김소월의 민요적 어조에 김억과 더불어 큰 영향을 끼친 계희영이 소월 집안에 김소월의 숙모로 들어온다. 김소월의 숙부는 당시 경성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서 자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남편이 자리를 비워서 홀로 남은 계희영는 어린 김소월을 앉혀놓고 자신이 알던 전래동화나 민요들을 들려주었다고 한다.[7] 이후 김소월은 남산보통학교를 입학,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는 오산학교[8]로 진학한다. 오산학교 재학 도중인 1916년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결혼한다.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시로서의 스승인 김억[9]과 사상적 스승인 조만식[10]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한편 같은 시기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받던 오순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교제를 하게된다. 하지만 김소월은 이미 홍단실과 결혼을 한 상태였기에 두 사람의 인연은 오순이 19살의 나이로 시집을 가게되면서 끊어졌고 오순은 의처증이 심했던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당시 김소월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탄식하며 김억에게 배운 시 작법으로 많은 양의 시를 썼는데 이들 시는 훗날 김소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에 실려서 김소월의 대표적인 서정시들로 자리잡게 된다. 김소월의 대표시 중 하나인 <초혼>은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 쓰여졌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김소월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하여 졸업하고 1923년, 일본의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쓰바시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하필이면 입학 직후 관동 대지진과 일본에 의한 한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 분위기가 흉흉해진 탓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귀국한다. 당시 집안이 점점 기울던 김소월의 집안은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11] 겸, 집안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문의 전 재산 절반을 밑천 삼아 가까스로 김소월을 상경학교에 입학시킨 것이었기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아쉬움과 자책감은 김소월에게 평생 한으로 남았다.

귀국 후에 김소월은 스승 김억과 경성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경성에서 김소월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나도향[12]과 친하게 지냈으며 경성에서 구성군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925년 김소월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을 김억의 자비출판으로 출간하였다.

낙향한 김소월은 할아버지의 광산 경영을 도왔으나 망하고 이후 할아버지의 집에서 독립하여 동아일보 지국을 열고 신문배포, 수금, 경영 모두를 혼자 도맡아서 했을 정도로 돈을 벌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신문사는 얼마 못 가서 당시 대중들의 신문에 대한 무관심, 일제의 방해 등이 겹쳐 문을 닫고 말았다.

신문사가 문을 닫은 이후 김소월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했고, 결국 193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유서나 유언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 라면서 쓴웃음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소월이 자살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김소월의 증손녀가 증언한 바로는, 김소월은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아편을 먹곤 했다고 한다. 그것으로 인해 아편 과다복용의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대표작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으로 일컫어질 정도로 대표작이 많다. 그의 시는 노래로도 많이 만들어져 아직도 불리고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13]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엄마야 누나야」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산유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먼 후일」[14]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초혼」 中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접동새」[15]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 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 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란 길이 이어 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을 김매이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16]

임 계신 곳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왜 못 가네
오다 가다 야속타 아아 삼수갑산이 날 가두었네 아하하

내 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삼수갑산 날 가두었네
불귀로다 내 몸이야 아아 삼수갑산 못 벗어난다 아하하

-「차안서선생 삼수갑산운」 中

"가고 오지 못한다" 하는 말을
철없던 내귀로 들었노라

만수산을 올라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 고 하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으랴

제석산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내님의
무덤에 풀이라도 태웠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진달래꽃 : 1999 수능 출제
엄마야 누나야 : 작곡가 안성현과 김광수가 각각 곡을 붙인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초혼
먼 후일
제이 엠 에스
산(山) : 1994-1 수능 출제
삼수갑산 : 1996 수능 출제
산유화

개여울 : 작곡가 이희목이 곡을 붙여 가수 김정희가 1967년 처음 불렀고, 이후 1972년 정미조가 리메이크해 히트했으며, 2017년 아이유에 의해서 다시 한 번 리메이크되었다.
가는 길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 1978년 해변가요제에서 배철수가 속한 그룹 활주로가 곡을 붙여 노래했다.
밤 : 장범준이 이 시를 바탕으로 자작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가족관계

생전 김소월은 아내 홍단실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얻었다. 그러나 이 중 장녀 김구생과 3남 김정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북한에 남았다. 맏딸 김구생은 한국전쟁 도중 요절했으며, 3남 김정호는 인민군으로 남한에 왔다가 포로가 된 뒤 대한민국 국군에 재입대하였고 전쟁 후 남한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로 인한 혜택은커녕 전혀 없고 지적재산권조차도 없으며 오히려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는 1958년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으며, 결혼 초기부터 선천적 신부전증으로 인해 몸이 허약한 아내의 병수발을 평생 들어줬다고 한다. 그는 평생 남한에 아버지 김소월 문학관을 건립하고 싶어했으나,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2006년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김소월의 후손은 손녀 김은숙과 손자 김영돈, 그리고 증손자 3명, 총 5명이 생존하고 있다.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할아버지를 기리고자 김소월 문학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2020년 현재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이들이 할아버지의 시로 인해 받은 돈은 엠피그룹측에서 광고를 낼 때 <진달래꽃>의 문구를 패러디하며 준 돈 약간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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