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농구인.
현역 시절에는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농구 대표팀에 속해서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하였으며, 지도자 시절에는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을 맡았다.
전성기 때는 한국의 찰스 바클리로 불렸고, KBL에서 포인트 포워드라는 포지션을 정립한 사나이.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상과 불운으로 인해 제 기량을 다 펴지 못하고 은퇴한 비운의 선수이기도 하다. 별명은 매직 히포.
선수 시절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했어요"
ㅡ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의 포워드 이승현
어머니는 국가대표로 한 시대를 풍미한 여자 농구선수인 홍성화. 정작 현주엽은 이 사실을 처음 농구에 입문한 중학교 1학년 때 알았다고 한다. 즉, 농구선수의 피를 타고는 났지만 시작은 늦은 편. 거기다 당시에는 살이 많이 쪘던 상태라 휘문중학교 1, 2학년 때는 존재감 없이 팀내에서 연습만 하고 있었다. 이때 현주엽과 같이 구석에서 연습만 하던 1년 선배가 바로 위장 전학 야구를 하다가 농구로 갓 전향한 서장훈이었다. 이 둘은 농구선수로 기본기를 다지고 폭풍성장하면서 동시에 잠재력이 폭발했고 휘문고는 무적이 되었다. 서장훈이 졸업한 후에도 현주엽은 휘문고를 혼자 이끌며 전성기를 이어갔다.
두 사람이 절친한 사이이기는 하지만, 선수로서 서로 간의 라이벌 의식은 정말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대의 현주엽 영입 과정은 정말 간단했다. "너, 연세대 가면 서장훈 그늘에 가린다." 이 말 한 마디에 현주엽은 고려대 진학을 결정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이건 다소 과장이 섞인 이야기고 실제로는 현주엽의 아버지인 현진구가 고려대 출신이라 아버지의 영향으로 고려대를 선택했다고 한다.
연고대에서 현주엽을 영입하기 위해서 여러 조건들을 맞춰주겠다 했는데 현주엽의 아버지께서 “아들농구로 돈 챙겼다”는 소리는 절대 안듣겠다며 그런 조건들은 차치하자고 농구만 보고 어느 학교에 입학할지 결정하겠다고 하셨다는 풍문이 있다. 스타선수들이 대학 진학 협상과정에서 많은 조건과 혜택을 약속받던 당시 스포츠계 관행에 비추어보았을때 현주엽같은 고교농구 슈퍼스타가 어떤 조건도 미리 약속받거나 협상테이블에 올리거나 하지 않았다는건 정말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후 서장훈과 현주엽은 대학 시절 내내 치열하게 격돌했다. 그러나 승자는 간발의 차이로 항상 우승을 차지했던 서장훈이었다. 서장훈은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문경은, 우지원, 이상민 등과 호흡을 맞추어서[] 2차례 농구대잔치 우승에 성공하지만, 현주엽과 전희철, 양희승, 신기성, 김병철이 포진한 고려대는 끝내 농구대잔치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한다
문제가 된 것은 1998년. 1997년 한국프로농구가 출범하면서 드래프트 원칙이 세워졌는데, 1993년 입학인 서장훈은 1년 유학이라는 공백기[]가 있는 관계로 졸업 시기는 같았지만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계약할 수 있었고, 현주엽은 드래프트 제도에 묶여 자기 마음대로 팀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현주엽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결국은 제도에 수긍하고 그를 지명한 청주 SK 나이츠에 입단하여 서장훈과 같은 팀이 되었다. 그러나 드래프트 현장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어쨌든 대학 무대를 평정한 슈퍼루키 2명을 동시에 보유하게 된 SK 나이츠는 단숨에 우승 후보로까지 거론되었지만, 정작 시즌이 시작되고 보니 두 사람의 시너지 효과는 제로였다. 개인 스탯만 놓고 보면 현주엽이나 서장훈 모두 평균득점 20점을 상회할 정도로 준수했지만, 둘의 호흡 자체는 생각만큼 맞지 않았고 팀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휘문고 때 검증되었던 서-현 조합이 왜 실패했을까? 이는 현주엽이 휘문고 시절과 달리 대학 진학 후 빅맨으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휘문중-고시절 현주엽은 고려대 시절에 비해 가벼운 몸이었고 진짜 윤대협의 재림처럼 전천후 스윙맨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센터였던 서장훈과 활동 범위가 겹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려대학교 진학 후엔 팀 사정상 몸을 불리고 센터로 전향하게 된다. 당시 현주엽 입학 전까지 고려대에는 연세대의 서장훈을 막을 빅맨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8cm의 전희철은 원래 현주엽과 비슷한 타입의 전천후 포워드에 몸싸움이 약해서 서장훈과의 매치업이 안됐고, 당시 고려대 최장신이었던 2m의 유학생 박재헌은 부상 등을 이유로 많이 출장을 못했다. 이 때문에 키는 (서장훈에 비해서) 작지만 힘과 투쟁심을 갖췄고, 골밑 플레이가 가능했던 현주엽이 서장훈과 매치업하는 빅맨으로 낙점된 것이다.[] 때문에 현주엽은 대학 시절 4년 동안 센터가 되었고, 프로에서 재결합했을 땐 이미 둘의 포지션, 레인지가 완전히 겹쳐버렸다.[]
덕분에 이 둘을 조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안준호 감독은 중간에 잘렸고, 새로 부임한 최인선 감독은 이 둘을 조화시키겠다는 생각을 포기한다. 평균 20득점 가깝게 올리는 선수지만, 어차피 외국인 선수도 있는 상황에서 역할이 중복된다고 보고, 현주엽을 트레이드 카드로 쓴 것. 당시 단장은 이인표였고, 스타가 필요했던 광주 골드뱅크 클리커스에서 현주엽을 원했고, 그렇게 1999년 12월 24일, 일명 '크리스마스 이브의 빅딜'을 통해 조상현과 현금을 얹어 골드뱅크는 현주엽을 영입했다.[]
골드뱅크에서 팀의 에이스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였다. 이 때 처음으로 어시스트에 눈을 떠서 평균 어시스트가 거의 포인트 가드에 맞먹는 7.6개, 5.0개를 기록할 정도. 만능 포워드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면서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그도 신체 강건한 남자로 군대는 피해갈 수 없었다. 당시 신체검사에서 196cm가 넘으면 군면제였지만, 공식 프로필과 달리 실제 신장은 이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가면 가는 거라서 수긍하고 갔나 싶었는데, 문제는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남자 농구가 금메달을 딴 것이다! 당시 상무 소속으로 국가대표팀에서 뛰었던 현주엽은 4Q 막판 동점 슛을 성공시키면서 맹활약하며 한국 남자 농구가 20년만의 아시안 게임 우승을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군 복무중인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바로 병역특례를 적용하여 전역시키는 제도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상무에 남아 군복무를 마쳐야 했다.
전역 후에는 코리아텐더로 돌아가서 KTF에 인수된 뒤에도 역시 '포인트 포워드'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이미 현주엽의 무릎 상태는 좋지 않아 이미 연골이 닳아버린 상황이었고, 외국인 선수들과 부대껴야 하는 4번 자리에서 투쟁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시스트에 주력하는 포인트포워드는 좋게 말하면 다재다능함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어정쩡함이었다. 그리고 현주엽은 불행히도 점차 어정쩡함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FA로 풀리기 직전인 2004-05 시즌 평균 14.2득점, 어시스트 7.8개를 기록하며 맹활약하고, PO에서도 평균 23점을 넣으며 분전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어시스트와 PO 활약에 주목했지 점점 줄어드는 평균 득점에는 주목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런 활약으로 현주엽의 FA 가치는 높아졌고, 이를 주목한 것은 포워드에 환장하던 신선우 감독이었다. 즉시 FA로 질러서 현주엽을 영입했는데, 결국 무릎이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젊은 때처럼 힘과 탄력으로 외국인 선수들과 맞짱을 뜰 수도 없었고, 패스에 주력하기에는 그의 무릎 역시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냉정하게 말해 LG에서 먹튀로 전락했다. 보상 선수로 KTF로 간 송영진이 알에서 껍질을 깨면서 성장한 것에 비하면 LG의 손해.
그래도 LG의 전력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팀에 있던 첫 해를 빼고 나머지 3년 동안 모두 PO에 올랐다. 가장 전력이 좋았던 것은 2006-07 시즌. 그러나 이 해 KTF와의 4강 PO에서 폭행 사태로 외국인 선수 퍼비스 파스코가 영구제명되면서 졸지에 외국인 선수 한 명만으로 경기를 치른 LG는 결국 패하고 만다. 현주엽의 프로 선수 커리어 동안 가장 챔피언결정전에 가까웠던 순간이 이때였다. 이후 현주엽은 은퇴할 때까지 프로와 아마가 함께 뛰던 시절의 농구대잔치[19]와 KBL을 통틀어서 챔피언결정전 무대를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하고 은퇴했다.
무릎이 좋지 않던 현주엽은 2009년 무릎 수술을 받았지만, 재활 도중 결국 선수 생활을 포기한다. 그래서 2009년 6월 24일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현주엽은 2009년 06월 25일 LG스포츠단 본사인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기자회견과 함께 은퇴를 선언했다. 이미 현주엽의 무릎은 2009-2010 시즌이 개막해도 12월에나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미 강을준 감독은 엔트리 문제로 인해 냉정해졌으며 귀화혼혈 드래프트 3순위로 문태영을 선발하면서 사실상 이별을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현주엽은 강을준 감독에게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정작 강을준 감독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강을준 감독과 현주엽 선수는 대학 동문 스승이자 제자였지만 결국 한 팀에서 물과 기름처럼 비극으로 끝난 것이다.
은퇴 기자회견 당시 현주엽은 평소에도 자존심이 강했는데 구단 관계자들마저 자존심이 매우 상한 상태로 충격을 받았다. 이미 무릎 수술을 받아 목발을 짚으면서 가까스로 은퇴식을 할 정도였으며 팬들에게 이별하기 전 농구를 잘 했던 한 선수로 기억됐으면 좋을 거라며 비극적인 은퇴를 하게 되었다.
화려했던 현주엽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끝맺음이 너무도 허망했다. 그래도 아시안게임에서 국가 대표로 출전해서 금메달을 얻은 게 현주엽에게는 선수로서 누린 최고의 영광이자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플레이 스타일
젊었을 땐 뛰어난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 득점, 리바운드에 영리하게 어시스트를 만들어 내는 능력 또한 일품이었다. 그 덩치에 점프력과 스피드가 좋은 편이라 파워포워드 포지션 내에서도 탑클래스급으로 자기매김했다. 대학에 와서 골밑 플레이어로 자리잡다보니 체중이 많이 늘었고, 운동 능력이 다소 줄긴 했지만, 무릎 부상을 당하기 이전에는 '한국의 찰스 바클리'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현주엽의 주된 공격옵션은 스핀무브에 이은 돌파, 혹은 점프슛이었다. 힘과 드리블을 바탕으로 골밑까지 파고든 뒤, 스핀무브를 통해 수비를 따돌리고 손쉽게 득점을 올리곤 했다. 특히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당시 결승전에서 이런 플레이로 대한민국을 살렸다. 야오밍, 리우유동의 높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중국 수비를 완전히 흔들었고, 마침내 역전을 이끌어냈다.
포스트업에 이은 골밑 득점도 큰 무기였다. 서장훈, 김주성을 앞에 두고도 힘으로 뒤지지 않으며 볼을 우겨넣는 장면은 흔히 볼 수 있었다. 대학시절에는 3점슛을 많이 던지지는 않았지만, 워낙 중거리 점프슛이 좋았던 선수라 쉽게 슈팅거리를 넓혀나갔고, 프로 진출 이후에는 주된 공격옵션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현주엽의 진가는 득점이 아닌 게임리딩능력에 있었다. 워낙 드리블이 좋고, 패싱 센스가 좋아 종종 포인트 포워드로 기용되었다. 2004-2005 시즌 KTF시절은 포인트 포워드로서 그의 진가가 제대로 발휘된 순간이었다. 당시 KTF는 무게감 있는 포인트가드가 없이 정락영, 이홍수가 가드 역할을 번갈아 맡고 있었고, 외국인 선수들을 잘 살릴 수 있는 리더가 필요했다. 이 때 현주엽이 중요한 순간에 게임리딩을 주로 맡았다. 이 시즌에 기록한 평균 7.8개의 어시스트는 리그 전체 2위였다. 무릎부상과 포지션 확립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더 오랫동안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재능이 오래 가지 못한 점은 아쉬운 부분.
은퇴 이후
선수 생활 당시에도 여러 염문이 많았다. 연예인과 염문 자체는 상관없는데, 이게 자기 관리 소홀로 빚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다. 자세한 이름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관심있는 사람들은 검색창에 현주엽을 치면 알아서 알게 된다. 어쨌든 결혼이 또래보다 좀 늦은 편이었고, 자칫 잘못하다가 은퇴하기 전에도 결혼은 못하는 건 아닌가 걱정하던 팬들도 있었다.
일반인과 2007년에 결혼했다.[] 슬하에 연년생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내외에도 어수선했던 고려대 농구부 감독 취임설이 돌기도 했으나 일선 지도자에는 딱히 마음을 두지 않은 듯.[] 2010년 7월 스포츠의학, 재활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아마도 자신의 부상과 재활 실패가 정말로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문제는 은퇴하고 모아둔 돈을 펀드 매니저에게 모두 맡겼다가 이걸 다 날려먹는 피해를 본 것. 그리고 이 때 날아간 돈이 무려 17억이다. 결국 주변과 연락도 모두 끊어지고, 대외 활동도 전혀 하지 않았다. 두문불출 그 사이 열린 OB 연고전이나, KBL 15주년 기념 올스타에 모두 선정되었지만 전부 다 불참했다
해설위원 활동
만두를 좋아할 것 같다
데가와 테츠로도 닮았다
이후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2014-15 시즌부터 MBC 스포츠플러스의 해설자로 복귀했다. 은퇴 이후로 처음으로 농구계에 발을 내딛게 된 것. 데뷔 무대는 2014년 9월 17일 열린 신인 드래프트 중계였다. 이후 10월 11일 개막전에서 모비스와 LG의 경기에 해설로서 한명재와 호흡을 맞췄는데, 첫 방송경기 해설이라 그런지 몰라도 재앙급의 해설을 쏟아내며 욕을 먹었다. 경기 보는 눈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해설자임에도 도무지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한명재 캐스터가 중계 도중 "현주엽 위원님, 말씀이 너무 없으신 거 아니에요?"[22]라고 토로할 정도. 그러나 방송국에게 극딜을 당했는지 이후 몇 경기를 치르면서 점차 입이 터지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부정적인 평가는 자연스레 사라지기 시작했다. MC용검정용검 캐스터와 주로 호흡을 맞추고 있으며, "현역 해설자 중 현주엽이 최고다."라는 여론도 많이 생길 정도로 호평을 받고 있다.
중계 도중 포인트 포워드(?)로 전향한 일화도 이야기를 해 줬는데 기량저하로 인해 팀을 캐리할 능력이 떨어져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밝혔다.
그 탄력으로 서장훈과 함께 무한도전에도 출연하였고 석주일과 함께 2015년 설날 특집 아육대 농구 해설로도 출연하였다. 2015년 2월 20일 SK 대 KT의 경기를 서장훈[23], 정용검 캐스터와 3명이서 중계하며 다채로운 썰들을 풀었다.[24]
2014-15 시즌 당시에는 샤킬 오닐이 진행하는 인기 프로인 Shaqtin' A Fool의 KBL판으로 보이는 현주엽의 보너스원샷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25]
2015-16 시즌에도 MBC스포츠플러스 프로농구 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정용검-현주엽 콤비는 해설 내용면으로나 예능감으로나 호평을 받고 있는데, 특히 오심이나 플라핑에 있어서 속시원한 해설을 많이 해주는 편. 중계석 바로 정면에서 본 장면에 대해 멀리서 있던 심판이 어처구니없는 콜을 주자 "그게 보이나 봐요... 전 안 보이는데"라며 극딜을 놓았다. 선수의 세세한 습관 등을 잡아내는 눈썰미도 보여주는 중.
2015년 12월 2일 동부 홈경기에서 정용검이 댄스타임에 피자를 따내기 위해 춤을 추면서, 현주엽에게도 춤을 추라고 강요하자 몸을 움찔움찔하더니 정용검을 혼내려 들었다. 결국 따낸 피자를 현주엽이 가져가자 정용검이 자기가 딴 피잔데 왜 현주엽 해설이 먹냐고 궁시렁. 그리고 그 피자는 이어진 작전타임 시간에 현주엽이 먹었다(…). 피자용검
그 뒤에 KCC 홈경기에서는 치킨도 받았다.
LG 감독으로 선임된 후인 2017년 4월 26일 챔피언결정전 3차전 중계방송 하프타임 때 작별 인사를 했다.
유튜브 활동
안녕하세요. 찐 현주엽 입니다. 독립된 채널로 유튜브를 시작하려 합니다. 2월 3일 '단식원' 편으로 첫 영상 시작하겠습니다! 많은 응원 그리고 의견 주시면 재밌게 만들어나가겠습니다.
2021년 2월 1일
2021년 2월 1일 공식 인스타그램를 통해 먹방 콘텐츠를 다룬 <먹보스 쭈엽이> 유튜브 채널이 오픈되었고, 티저가 공개된것을 알렸다.
이틀 후 2월 3일 첫 영상이 올라왔다.
유튜브 채널을 개설 2주 만에 놀라운 조회수 추이를 보이고 있다. 구독자 수에 비해 영상 조회수가 굉장히 잘 나오는 편이다.
현주엽은 특유의 깔끔한 먹방은 물론이고 자신만의 레시피로 요리를 선보이고 있고, 특별한 비결까지 공개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2021년 3월 14일 하단 서술된 H모 선수의 학교폭력의혹 유력 후보로 거론된 이후 <먹보스 쭈엽이>의 모든 영상의 댓글을 사용중지 하였다.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
2017년 4월 24일 서울 잠실 야구장[]에서의 감독 취임식에서 김종규, 조성민, 기승호와 함께.
KBL 프로농구의 명장이었던 김진 감독과 구단 역대 최장수인 6년 이후 인연을 포기한 은퇴했던 친정팀인 LG에서 창원 LG 세이커스의 7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08-09 시즌 은퇴 이후 8년만의 복귀였다. 기사
1990년대 농구대잔치 스타 출신 감독의 시대를 환영하기도 했으나 프로와 대학에서 감독은 커녕 코치 경험조차 없는 왕초보에 대해 경기력이 더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다.
코치 경험이 전혀 없이 감독을 맡은 터라 LG팬만 아니라 KBL팬 대다수가 반신반의하는 중. 이 분처럼만 하지 않으면..
2017년 4월 27일 원주 동부 프로미에서 재계약에 실패한 전 동부 프로미 감독이었던 김영만을 수석코치로 불렀고, LG가 충분히 선임할 수 있는 후보군인 서동철 감독을 보좌했던 전 KB 스타즈 코치 출신이자 팀의 창단멤버 겸 이충희 초대 감독 시절의 주장 출신 센터인 박재헌을 코치로 부르더니, 전자 라이벌인 서울 삼성 썬더스 출신의 2005-06 KBL 파이널 MVP였던 1년 후배인 강혁을 코치진으로 합류시켰다. 실제로 강혁 코치를 제외하면 자신보다 선배인 2명을 밑의 코치로 둔 파격인사였다. 기사
이 배경에는 창단 직원으로 사무국장에서 단장까지 승진한 한상욱 단장이 주도했다.
사퇴후
사퇴 후 2020년 5월 10일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 재출연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현주엽 전 감독은 “현재 15~20kg 정도 살이 빠진 상태다. 농구를 그만두고 난 후 머리가 나고 있다더라”라며 근황을 밝혔다.
이후 ‘걸리버 3형제’로 불린 박도경 LG 홍보책임 차장[]과 채성우 통역[]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까지 나오면서 또 한 번의 ‘먹방’을 예고하기도 했다.
이날 방송에서 40kg이 넘는 소고기를 직접 정형하는 모습을 보인 현주엽 감독은 “기술부터 배울 생각이다. 아직 고깃집을 차릴 계획은 없지만 기술을 배워 준비해둬야 할 것 같다”라며 진지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기사. 여기서도 강혁을 갈구고 있는 게 함정.
2020년 6월부터는 JTBC에서 방송 중인 위대한 베태랑이라는 프로에도 출연 했다. 출연 목적은 체중감량이긴 했으나 첫화 최후의 만찬에서도 먹성이 어디 가지 않은것도 그렇고[] 결국 김호중과 더불어 감량에 실패했다.
2021년 2월 7일부터 허재와 같이 뭉쳐야 쏜다를 하면서 코칭스태프를 하게 되는데 이게 어쩌면 현주엽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63] 해설도 겸해서 코치보다는 해설위주의 활약을 기대하는게 좋을듯 하다. 5화에서 의외의 평을 뒤집은 상황이 나왔는데, 그 전회차들에서 감독인 허재는 농구를 모르는 타 종목 선수들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농구용어로 작전지시를 내리며 선수들은 이해도 못 하고 타임아웃을 날려버리던 반면, 현주엽은 어려운 용어를 쓰지 않고 눈높이를 맞춰 무엇이 잘못됐는지 위주로 지적을 하여 물 마실 시간여유까지 벌었기 때문이다.
2021년 2월 1일 먹보스 쭈엽이라는 채널명으로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서 본격적인 유튜브 활동을 시작했다. 캐릭터가 캐릭터인 만큼 이미 먹방이 주류를 이룰 것으로 보이며 2021년 2월 21일 기준 구독자수 20.6만명을 기록했다. 처음 올린 영상에서 사칭채널들 접으라는 썸네일 업로드로 봐서는 이미 사칭채널들이 있다는 것을 어느정도 의식한 듯. MCN소속은 MCCOI(메코이)
이후 10만명 이상을 돌파하면서 꾸준히 상승세중이다. 또한 조회수 역시 100만회를 넘긴 영상이 대다수일 만큼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사건사고
대한민국 농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레전드이나, 코트를 떠나서는 각종 논란과 사건·사고를 여러 차례 빚으며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그가 현역 시절에 보여준 실적과는 별개로 현주엽이란 인간의 행적을 보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해도 무방한 수준의 만행(폭행, 음주운전 등)을 저질러 왔다.
음주 운전
2013년 7월 10일, 음주운전으로 불구속 입건됐다.
중앙선 침범 불법 유턴을 하다가 적발되었으며 면허 정지 100일 처분을 받았다. 또한 단속을 피하기 위해 도망쳐서 경찰차와 추적전을 벌이기도 했다
사기피해사건
은퇴하고 모아둔 돈을 중·고교 및 대학 동창인 황 모 씨로부터 소개받은 삼성선물의 펀드 매니저 이 모 씨에게 모두 맡겼다가 날려먹었다. 지인 박 모 씨 소개로 돈을 투자했는데, 박씨와 이씨가 짜고 다른데 다른 고객들 손해난 돈을 메꾸는데 현주엽의 돈을 이용했다.
2012년 5월 12일 삼성선물을 상대로 한 17억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삼성선물에서 8억 7천만원을 돌려받았다고 하나, 그 전에 돌려받은 돈도 있어서 총 손해금액은 8억여원 가까이 된다.
위 손해배상 민사재판 과정에서 위증을 한 혐의로 박씨로부터 고소를 당해 2014년 10월 1심에서 벌금 150만원을 선고 받았으나, 2015년 12월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꼰대질
2020년 7월 19일,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보여준 태도가 논란이 되었다. 해당 방영분을 보면 초반부터 갓 25살 된 어린 PD에게 시종일관 거만한 태도로 반말을 하며 "군대는 나왔냐?", "인상이 좀 그렇다", "고문관 같다" "한 달 안에 그만두실 분"이라며 약을 올리며 비아냥대고, 도티나 다른 관계자들의 질문이나 대화는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먹는 것에만 집중하고 계속 딴 소리만 하는 등 무례한 모습을 보여줬다. 처음부터 관계자의 자기소개 요청에 "했다 치고"라며 간단한 격식조차 차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더군다나 다짜고짜 도티의 수익부터 묻거나, 도티가 계산하는 자리임에도 무려 14인분[65]을 멋대로 주문하고, 회사에 가서도 도티를 대놓고 무시하며 도티에게 과자를 가져오라며 심부름을 시키고 과자를 가져오자 자신이 원하는 과자가 없다며 역정을 내는 등의 행동만을 보여줬다. 도티는 샌드박스 창업자이자 국내 최초 게임 유튜버 구독자 200만 돌파자이자 현주엽의 유튜버 선배이다. 출연진인 전현무와 김숙도 대놓고 그를 깠을 정도. 결국 시청자 게시판은 현주엽의 사과와 하차를 요구하는 반응으로 주 지분을 다 차지하였고, 네이버에는 현주엽을 치면 자동완성으로 '현주엽 ㅈ같다', '현주엽 꼰대'가 뜰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해당 사건은 빠르게 묻혀갔는데, 스포츠 스타 출신의 인물이 공중파 방송에서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고도 사회적으로 공론화가 되지 않은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은 사당귀 출연 초기 감독으로 나왔을 적에도 감독 외적인 꼰대는 있었다. 대표적으로 필리핀 전지훈련 당시 휴식시간에 식당을 가서 망고쉐이크를 시켰는데 본인의 의지대로 해당 자리에 참석한 모두에게 시키고, 그 차가운 것을 원샷으로 파도타기를 시켰다. 당연히 선수들은 이에 머리가 깨지는 고통을 얻었지만 본인은 태연하게 원샷을 해서 오히려 이것을 원샷한 현주엽에 놀란 반응인지라 부각이 많이 되지 않았을 뿐.
학교폭력
2021년 3월 14일 보배드림에 현주엽의 중학교 후배라고 주장하는 이용자가 중학 시절 현주엽의 학교폭력을 폭로했다.
학폭 당사자의 이름은 특정되지 않았지만 이니셜을 H로 특정하고 휘문중을 나왔으며, 77년생인 작성자의 2년 선배인 75년생이라는 점, 어머니가 농구 국가대표였으며 현재 방송과 유튜브에서 활발히 활동중인 유명인, 음식 먹는 걸 자랑삼아 행동하는 모습이라는 표현을 보면 현주엽을 지칭한 것이 확실했다.
최초 폭로글 (수정후 재업로드)
이후 현주엽은 개인 SNS 계정을 돌연 삭제했으며, 자신의 유튜브 채널인 <먹보스 쭈엽이>에 게시된 모든 영상의 댓글을 사용중지 하였다. 같은 날 오후 9시 정각에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작성한 해명문에 따르면 "얼차려로 약간의 군기를 잡은 적은 있었다. 그 점은 사과하겠다. 하지만 개인적인 폭력은 절대로 없었다. 수사 기관에 의뢰하여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 원문
해당 사건이 터진 후, 현주엽이 출연 중인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뭉쳐야 쏜다 제작진은 사실관계 확인과 경과를 지켜 본 후 통편집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기타 정보 유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세훈에 대해알아보자 (0) | 2021.03.17 |
---|---|
황사에 대해알아보자 (0) | 2021.03.16 |
홍콩 경무처에 대해알아보자 (0) | 2021.03.14 |
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 부동산 투기 사건에 대해알아보자 (0) | 2021.03.13 |
유로파리그에 대해알아보자 (0) | 2021.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