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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1. 9. 7.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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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현대계 대규모 기업집단인 현대중공업그룹의 조선ㆍ해양플랜트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조선해양의 자회사이다. 약칭은 '현중'이며 영문 약칭은 'HHI'이다.

2017년 지주회사 분리 이전까지 대주주 정몽준 → 현대중공업 → 현대삼호중공업 → 현대미포조선 → 현대중공업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의 정점에 있었던 회사이며, 현대중공업 로봇사업부가 인적분할되어 신설된 현대로보틱스를 지주회사로 한 지주사 전환 이후에도 여전히 그룹 내 최대 규모의 자산규모와 매출을 기록하고 있고, 글로벌 1위 조선사라는 상징적 의미를 보유하고 있다. 여담으로 지주사 전환 이후 최상위 지배회사가 현대로보틱스니 더 이상 현대중공업그룹이 아니라 현대로보틱스 그룹 아니냐는 소수 논란이 있었으나, 2018년 3월 30일 정기주총에서 현대로보틱스가 현대중공업지주로 사명을 전환하면서 이러한 논란이 종식되었다.

2017년 4월 이전 현대중공업 단일 기업 시절에는 정몽준이 최대 지분을 보유하여 대주주의 위치에 있었으나, 17년 4월 분할 이후 지분 거래를 통해 정몽준의 지분은 모두 현대중공업지주로 이전되었고, 대신 정몽준은 장남 정기선(현 현대중공업 그룹 부사장)과 함께 현대중공업지주의 지분을 30% 이상 보유한 상태이다.

정몽준은 대외적으로 정치를 하기 때문에 그룹 경영에 일선 관여하지 않고 있었으나[], 아들인 정기선은 입사 이후 초고속 승진을 통해 부사장 직급을 유지하며 경영(주로 영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여담으로 대주주였던 정몽준이 국회의원이던 당시에는 국회의원 평균 자산을 계산할 때 정몽준을 포함시킬 경우 심각한 평균 왜곡 현상이 발생하여 정몽준을 제외하고 계산해야 했다

이후 2019년 6월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위한 물적분할을 단행하여 중간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기존 사업자번호 유지)과 사업회사인 현대중공업(신규 사업자번호 취득)으로 분할되었기 때문에 2021년 4월 기준 현재는 한국조선해양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2021년 연내 재상장[]을 추진하고 있으며 계획에 따르면 지분 20%를 공모하여 한국조선해양 지분이 80%로 줄어들 전망이다.

현대중공업그룹에서 대우조선해양을 성공적으로 인수 시 세계 조선시장 점유율 20% 이상을 차지하는 조선 그룹이 될 전망이며,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주력 선종이 완전히 겹치는 만큼 중복 부문에 대한 구조조정이 예상되어 대우조선해양 노조 및 거제시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노조는 1987년 결성 이후 한국노총 금속노련 소속이었으나, 1994년 탈퇴 이후 민주노총 창립에 기여해 금속산업연맹 소속이 되었고, 하청노동자 문제를 계기로 상급단체와 갈등을 겪다가 2004년 민주노총에서 제명되었다. 그 이후 개별노조를 유지하다가 2016년 산별노조 재가입 추진을 진행하여 현재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소속이다.

참고로 쿠바 해외 지폐 10페소에 나오는 발전소가 바로 이 회사의 제품이다.

 

기업 역사

1968년 제2차 경제개발 계획기간동안 정부는 제철, 기계, 화학, 조선을 4대 국책사업으로 설정하고 중점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1970년 현대건설 조선사업부가 발족된 후 1971년에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이 처음에는 우방인 미국에 자금을 빌리러 갔으나 거절당했고 일본 역시 한국에서는 시장이 크게 성장치 못할 것이라며 거절당했다. 하지만 스페인, 프랑스, 영국, 서독, 스웨덴 등 유럽 선진국에서 돈을 빌려서 조선소를 건설할 수 있었으며, 영국 애플도어 및 스코트리스고우 조선소와 기술/판매협조를 맺었다.

1972년에 그리스 리바노스 사와 26만톤짜리 초대형 원유운반선 건조계약을 맺었고, 어촌마을 경남 울산 방어진에서 첫 삽을 뜬 후 이듬해 선각공장을 준공하여 '현대조선중공업'으로 분사했으며, 1974년에 울산조선소 1~2도크를 세워 리바노스에 원유운반선 1호선을 인도하였다.1975년 철구사업부를 신설한 후 처음으로 비조선 사업을 시작했고, 선박수리 담당업체 현대미포조선소도 세웠다. 1977년 중전기사업부와 기관차사업부를 신설 후 엔진공장도 세우고, 이듬해 현 사명으로 개칭하고 기관차와 엔진, 중전기사업을 '현대차량[]', '현대엔진[]', '현대중전기[]'로 분사시켰다.

1980년 원자력사업본부를 발족하고 한국형 구축함 'FF-951 울산함'을 진수했으며, 국내 최초로 자동차운반선을 건조했다. 1981년 현대특수화학을 비롯해 1985년 현대해양개발, 1986년 현대종합제철, 1989년 현대엔진공업 등 관련 기업들을 각각 합병해 규모를 넓혔고, 1982년 정주영 그룹회장의 6남 정몽준이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2세 경영을 시작했다. 1983년에 화공사업부를 빼내 방계기업 한국내화로 넘겼고, 1986년에 미국 드레서와 로자 등과 기술제휴를 맺어 이듬해 건설장비사업부를 발족했다. 1991년 잠수함 전문화업체로 선정된 후 1993년에 현대중전기, 현대중장비산업, 현대로보트산업, 현대철탑산업 등 4개사를 또 합병했고 1994년 장외시장에 등록되었다.

1995년 한국 제조업계 최초로 베트남에 가스파이프라인을 준공한 뒤 1996년 인터넷 홈페이지를 열었고, 1998년 울산 현대 호랑이 프로축구단을 현대자동차로부터 넘겨받고 '현대예술관'을 세웠다. 1999년 유가증권시장으로 옮기고 2000년 현대그룹 왕자의 난을 계기로 2002년에 현대미포조선 등을 끌고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하여 정몽준을 중심으로 한 현대중공업그룹 출범을 주도했다.

 

물적분할 및 관련 논란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위한 과제로 물적분할을 통한 중간지주회사 설립 의결이 필요하였으며, 회사의 일방적인 물적분할을 반대하는 노동조합에서는 주주총회 개최를 방해하기 위해 주총장소인 한마음회관(울산 동구 소재, 현대중공업 소유)을 점거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회사는 주주총회 당일 갑작스럽게 장소를 울산대학교로 변경하여 순식간에 기업분할 안건을 의결, 분할을 확정지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기물파손 및 업무방해에 대해 회사가 조합원을 무더기로 징계 및 고소하면서, 노사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지경까지 악화되었다.[]

 

중소기업 기술 탈취 논란

2018년 현대중공업이 기술을 탈취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공정위는 현대중공업이 엔진 부품회사로부터 기술을 탈취하였다고 판단하여 9.7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고,@ 법원에서는 동일 회사에 8.35억원을 일방적인 단가 인하에 대해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은 공정위와 법원의 판단에 불복하고 공정위와 법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다만 본 논란에 대해서는 현대중공업도 억울한 면이 없지 않은 것이, 현대중공업의 기술탈취를 주장한 회사는 현대중공업의 힘센엔진 도면을 무단 도용하여 제품을 제작/판매한 혐의로 적발되어 재판 진행 중에 있다.@@ 즉 상호간에 소송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큰 기업이라고 일방적으로 언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셈.

현대중공업의 산기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혐의 없음'으로 불기소된 상태이며, 부품회사에서는 이에 불복하여 재정신청을 요청하였으나 심리가 진행 중에 있다

 

직제 및 구직

오랜 역사와 제조업 특성 상 생산직군이 있기 때문에 직책 및 직급 체계가 복잡하다. 기존에는 단순히 생산기술직과 사무기술직으로 직제가 구분되어 있었으나 개편을 통해 일반 사무직, 생산기술직 외 연구직과 설계기술직으로 직급 체계가 구분되었다.

사무직의 경우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으로 이어지는 일반 기업과 동일한 직급 체계를 따르며, 생산기술직은 7급-6급-5급-4급-기원(대리급)-기장(과장급)-기감(차장급)-기정(부장급)으로 이어지는 체계, 연구원과 설계기술직의 경우 연구원/엔지니어-선임연구원/선임엔지니어(대리급)-책임연구원/책임엔지니어(과, 차, 부장급)로 직급이 구성되어 있다. 간혹 사무직과 연구원, 설계기술직 간 직군 전환이 일어나기도 하며 직군 전환 시에는 해당하는 직급으로 변경된 후 전보 조치된다.

그 외 특수채용(전문직[], 별정직[], 계약직 등)의 경우 별개의 직급을 부여받기도 한다.

생산직의 경우 정규직 외 일반적인 하청업체와는 생태가 다른 사내하청(이하 사내협력사)도 존재한다. 사내협력사의 경우 아예 현대중공업 부지와 건물에 사무실을 차리고 현대중공업 생산관리자들의 작업지시를 받는 특이한 형태를 보여준다. 물론 일단은 독립된 법인들이기 때문에 완벽한 상하 관계나 종속 관계에 있지는 않다. 물론 갑을 관계에 속해있기는 하지만 세계적인 비정규직 증가, 고용 유연화 추세 탓인지 비교적 협력사의 비중이 커지는 추세에 있다.[] 정규직 생산직(이하 직영)의 경우 노조의 보호로 인해 고용 안정도가 매우 높으며 보수 측면에서도 사무직군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이들도 노천의 도크나 안벽 등 후행 공정에서 작업을 하는 것은 비슷한 만큼 작업환경이 비교적 열악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근처에 현대자동차 직영 생산직이라는 귀족(?)이 존재해 이를 부러워하는 경우도 있다고.

직속 교육기관인 기술교육원[]에서는 용접, 특수용접, 배관, 기계, 전기, 도장 등 각 직종별 제작기술을 이론, 실습을 통해 가르치고 있다. 생산기술직 채용 방식은 타 기업의 채용방식과 달라서 대부분 경력직 출신자로만 뽑는다.[] 매년 몇 회에 걸쳐 기술연수생을 뽑는데, 수료자에 대해 사내외 협력사에 취업기회를 제공하고 수료 후 1년 이상 협력사에서 근무할 경우 직영 채용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술교육원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았다. 다만 2015년부터는 기술교육원 수료자가 아니더라도 협력사에서 1년 이상 근무시 직영 채용에 응시할 수 있도록 채용방식이 바뀌었다.

기본적으로 연봉제가 아니라 월급제를 채택하고 있어 급여 계산이 매우 복잡하다. 연봉제를 적용하는 회사가 연봉을 결정하고 이를 일정 횟수로 나눠서 지급하는 형태라면 현대중공업은 기본급을 정하고 이에 따라 수당, 상여, 성과급등을 계산하기 때문에 연봉 계산에 반영해야 되는 요소가 너무 많아져서 받는 본인조차 연봉을 알지 못한다. 실제로 받는 금액도 사람마다 수당(위험수당, 직무수당 등)의 차이가 있고, 이 수당이 계산에 들어가는 순간 이중 삼중(월급, 상여, 성과급)으로 작용한다. 결국 연말정산을 하지 않으면 자신도 얼마나 받는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쉽게 말하자면 한번에 주는 돈은 적어 보이나, 이를 굉장히 자주 주기 때문에 실제로 받은 것을 합산해보면 유사한 규모의 타 기업에 비해 적지도 많지도 않다[]. 과거 호봉제의 잔재이나 기업 역사가 오래되고 인원 규모가 크기 때문에 성과 기준 연봉제 전환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사무직 과장급 이상(비노조원)을 대상으로만 연봉제 전환이 이루어졌다.

본사가 울산에서도 가장 끝자락인 동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타 지역 출신을 위한 기숙사와 사택 제공이 다양하였지만, 경기 불황 시절에 대부분 매각하여 현재 남아있는 기숙사는 예전만큼 많지 않다. 다만 서부동 근처 기숙사는 새로 신축해서 좋은 편이다 기숙사마다 각종 편의시설(매점, 당구장, 노래방, 독서실, 피트니스 룸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월 임대료는 5만 원 가량으로 저렴한 편. 이 기숙사들은 회사 바로 앞에 있어서 셔틀버스를 이용한 출퇴근이 용이하다. 울산광역시는 광역시 중 유일하게 지하철이 없기 때문에 수많은 버스 노선이 이를 커버하는데, 동구를 지나는 대다수의 버스들은 현대중공업 앞을 지나가도록 노선이 구성되어 있어 시내나 번화가로의 교통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다만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이 있는 북구부터 동구까지의 도로가 유동인구에 비해 좁기 때문에[] 출퇴근시간에 교통체증이 있다는 단점이 있긴 한데 이마저도 아산로가 아닌 염포동으로 들어가는 도로에 한정되는 이야기다.
자동차를 이용한 출퇴근은 권장되지 않는다. 우선 특정 인원을 제외하고는 사내에 자동차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출입문 근처에 차를 주차해야 되는데, 주차장이 극히 부족하여 출근시간 1~2시간 전 만차가 된다. 때문에 대부분 대중교통이나 사설 출퇴근버스로 이동하며, 동구나 북구에서 거주하는 임직원들은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하여 출근하는 경우가 많다. 이 출퇴근 시간의 긴 오토바이 행렬은 처음 보는 관광객들이 신기해하는 장관 중 하나이다. 사내에 오토바이 판매/수리점이 운영되고 있어 사내에서 갑자기 오토바이가 고장나더라도 수리를 받기 용이한 것도 있다. 또한 사내 말고도 회사 근처 여러 오토바이 판매점이 있어서 편리하기도 하다

기업문화의 경우 보수적으로 군대에 준하는 문화, 술을 좋아하는 문화 등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대부분의 기업이 그렇듯 부서마다 분위기가 다르며 생산관리 계통의 사무직이나 생산직에서 이런 분위기가 강하고 반대로 일반 사무직의 경우는 이런 분위기가 덜하다. 2010년대 후반 들어 50~60년대 베이비붐 세대가 정년, 희망퇴직 등으로 퇴장하기 시작했으며 직군을 가리지 않고 젊은 신입사원 및 경력직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기업문화가 바뀌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문과 계통의 경우 학벌, 스펙, 인상 등을 많이 보는 편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과 계통의 경우 그런 양상이 비교적 덜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조선해양공학과를 보유한 대학이 수도권에는 몇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제조업 회사 특성상 문과에 대한 상대적 규모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게 다 이과 계통에 비해 문과 계통이 경쟁률이 치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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