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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2. 4. 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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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방의 제2·4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1999년 12월 31일 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이래 현재까지 장기집권 중인 러시아의 대통령이다. 명목상으로는 민주적 절차에 따른 자유선거를 통해 당선된 국가원수지만, 다수의 부정선거 논란과 수많은 정적들을 탄압, 암살한 의혹으로 인해 이전부터 사실상 독재자로 간주되었으며, 2020년에는 대통령 연임 제한 철폐 개헌으로 종신집권의 길을 열었다. 통합 러시아당의 실질적 당수이기도 하다. 물론 통합 러시아의 법적 당수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긴 하지만, 사실 메드베데프가 당수인 이유는 당정분리를 준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에 불과하며 이쪽 또한 실권은 푸틴이 장악하고 있다.

정식으로 연방 대통령을 맡은 뒤 3연임이 금지된 헌법을 무력화시키는 방안으로 당시 부총리였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에 앉혀놓고 자신은 총리로 자리를 옮겨 여전히 실권을 장악했고, 메드베데프의 임기가 끝난 다음 치러진 대선에서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메드베데프는 총리로 다시 옮겨갔다.[] 또 2016년 총선에서 사실상 그의 정당인 통합 러시아가 의석을 과반수 차지하면서 그의 영향력은 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16] 2018년 치러진 재선에도 성공해 2024년까지 임기 예정이다.

외교적으로는 러시아의 패권유지 및 소련 시절의 위상 회복 우선주의 노선을 펼쳐왔으며, 그 과정에서 체첸 공화국 독립운동 탄압, 크림 반도 강제 병합 등으로 국제 사회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올림픽에서 러시아 선수들에게 집단 약물을 주입했다가 이 사실이 나중에 발각된 것 또한 러시아에 대한 국제 여론이 악화되는 데 일조하고 있다. 특히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를 일으켜 이해관계가 얽힌 국가들 뿐만 아닌 범 세계적으로 비난을 사고 있다.

2013년~2016년까지 4년 연속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2020년 4월 22일 개헌 국민투표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연기되었지만, 얼마 후 실시한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2036년까지 집권이 가능해졌다. 그때쯤 만 83 ~ 84세가 되는 푸틴의 나이를 고려하면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어린 시절

1952년 10월 7일 소련 레닌그라드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쥐들이 지나다니는 소련 노동자들의 낡고 허름한 공동 주택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스피리돈 이바노비치 푸틴 (1879~1965)은 무려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다챠에서 일하는 전속 요리사였으며 아버지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 푸틴 (1911~1999)은 소련 해군에 징집돼 잠수함 부대에서 복무하다 NKVD와 소련 육군으로 전임된 후 독소전쟁에 참전해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독일군의 포격으로 한쪽 팔이 절단된 상이군인이었다. 어머니 마리야 이바노브나 푸티나 (1911~1998) 역시 친정 식구들 다수가 전쟁통에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참극을 겪었다.[] 푸틴 부부가 가진 첫째 아이 알베르트는 어릴 적에 일찍 죽었고, 둘째 아이 빅토르는 레닌그라드 봉쇄 중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그렇게 폐인이 된 30대 부부만이 살아남아 전쟁 후에 마흔이 넘어 세번째로 낳은 아이가 바로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청소년기의 푸틴은 본인도 인정했듯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또래 불량학생들과 어울리며 물건을 훔치거나 불량학생들의 패싸움에 가담하고 아버지와 난투극을 벌이는 등 크고 작은 비행을 저지르던 비행청소년이었다.[] 그 탓에 소련 공산당 어린이 조직인 피오네르 동맹에 한참 늦게 가입했고 학교생활도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전후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며 겨우겨우 지역 공산당 중간 간부로 승진한 그의 부친과 독실한 정교회 신도이자 파트타임 일거리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던 모친은 당시 어린 푸틴의 행실을 교정하려 노력했으나 처음에는 큰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부모의 꾸준하고도 엄격한 가정 교육과 푸틴과 가깝던 운동코치들의 지도 덕분에 푸틴은 고학년 시절부터 모범적인 학생으로 거듭났고 부진했던 성적이나 당 활동에서도 우수한 모습을 보였다.

1960~7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푸틴은 철이 든 이후 학업에 집중하면서도[] 어린시절 취미를 붙인 호신술(유도 등) 연마를 계속 이어갔다. 스파이 활동에 대한 강한 열망 때문에 체육을 업으로 삼지는 않았으나 대학시절에 유도 사범자격을 얻은 뒤 지방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는 등 성인이 돼서는 그럭저럭 프로급의 호신술 실력을 갖추게 된다. 또한 비행청소년 시절의 다소 자유분방한 기질을 잃지 않고 흐루쇼프 해빙기(1956~64)에 시작되어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집권 초기까지 짧게나마 이어진 소련의 낙관적인 사회분위기와 비교적 자유로운 소비/문화생활을 즐겼으며 친구들과 몰래 서구권 문화매체를 향유하기도 했다.

선전물에 등장하는 영웅적인 첩보원들의 모습에 사로잡혀 일찍부터 국가보안위원회를 동경한 푸틴은 청소년 시절에 만난 국가보안위원회 레닌그라드 지부 공보관의 조언대로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법학부에 입학해 재학 도중인 1974년 국가보안위원회(일명 KGB)의 수습요원으로 발탁되었다.

kgb

전직 KGB 요원으로 첩보 활동에 대한 세간의 환상이 있고 실제로 국외에 파견되기도 했지만 푸틴이 맡은 일은 낮은 단계의 보안과 연락업무 등에 그쳤다고 한다. 즉 중간관리 사무직 요원이었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흑색 신분의 특수요원이 아니었다. 007로 대표되는 자극적인 블록버스터물의 첩보원과는 거리가 먼 셈이다.

물론 평범한(?) 정보직 요원이었어도 나름 KGB 출신인만큼 푸틴은 블랙요원으로 화려하게 활동한 이력만 없을 뿐이지 기초 첩보요원 훈련 등은 다 받은만큼, 사격이나 격투, 장비 조종 등을 능숙히 할 수 있고 이를 쇼맨십으로 활용한다.

1974년 수습생으로 정보계에 발을 들인 푸틴은 1975년, KGB 레닌그라드 지부의 행정부서와 국내담당부서(제2총국 등)에서 근무하며 다른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업무와 각종 스파이 교육을 동시에 소화했다. 이후 해외부서로 이동해 보안업무를 맡으며 모스크바 본부와 레닌그라드 지부, KGB 아카데미를 오가다 1983년에 교제중이던 첫번째 부인 류드밀라 시크레브네바[]와 결혼하고 1985년 여름에 KGB 제1총국 소속으로 동독 드레스덴 지부 파견 근무를 명받았다. 이때의 출장이 푸틴 생애 최초의 외국방문이었다.

1990년 드레스덴 지부의 다른 간부들과 함께 본국으로 소환되기 전까지 푸틴은 동독에서 상당히 평이한 정보업무에 종사했다.

2009년 3월 16일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전속 사진가 피트 수자가 푸틴의 젊은 시절(36세)이라고 주장하며 공개한 사진. 관광객인 척 위장하고 근무했던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알려져 있다시피 푸틴은 중간관리직 요원으로 드레스덴에서 쏟아지는 서류업무를 처리하며 현장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기에[], 당시 모스크바에서 경호내지 사찰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 그런고로 저 사진 속 인물은 푸틴이 아니라 푸틴을 닮은 타인이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도 이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말한 바 있으며 푸틴에 대한 영웅주의 서사와 함께 널리 퍼진 대표적인 오해 사례다.[]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러시아 TV와의 인터뷰에선 "성난 동독 사람들이 드레스덴의 슈타지(동독 비밀경찰) 건물을 공격하던 와중에 일부 무리가 KGB 지부로 몰려들었는데 나는 그곳에 있었고 '난 통역'이라고 말해서 위기를 넘겼다"고 말했다.[]

푸틴이 통역이라고 해서 위기를 넘겼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드라스덴 KGB지부에서 있었던 일은 러시아에서 푸틴의 영웅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유유럽방송의 관련된 영상 # 당시 드라스덴 시민과 인터뷰 할수도 있었을텐데 통역이라고 해서 위기 모면했다는 것은 푸틴에 대해 쓴 책 작가가 꾸며낸걸로 생각된다.

워낙 긴급한 상황이라 부재중인 지부장이나 KGB 모스크바 본부의 지시를 기다릴 틈이 없어서 동독 소련 주둔군 사령부에 연락해 당직장교를 통해 수 차례나 소련군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당직장교는 명령 내려오지 않았다면서 병력을 출동시키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 나중에서야 명령계통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시위대가 물러가고 나서 몇 시간 뒤에 소련군이 출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는데 푸틴은 이때의 경험으로 수직적이고 경직된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감이 심해졌다고 한다. 본국으로 돌아온 뒤로는 자차로 무면허 택시를 운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안그래도 전술한 동독에서의 위기를 넘긴 사건을 비롯하여 5년 간의 동독 파견생활 도중 서독의 균형잡힌 경제발전상과 뛰어난 산업모델에 큰 영감을 받았고 이후 동구권 침체,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분열과 호네커의 몰락, 독일 재통일 준비를 모두 지켜본 푸틴은 그 과정에서 소련에 맞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도입의 필요성을 점차 실감한다.

그와 동시에 푸틴은 이전부터 보수적이고 현실인식이 떨어지며 지나치게 복지부동적인 주류 공산당 지도부 및 원로들에 대해 큰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체제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던 와중에도 여전히 소련에 충성적이었던 그는 자신의 영웅인 유리 안드로포프와 정보부의 옛 위인들을 존경했고[] 처음엔 고르비의 개혁작업도 긍정했지만 조국이 하루빨리 정상화되길 원하던 그의 바람과 달리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로 치닫았다.

경제난에 빠진 소련과 마찬가지로 귀국 후 푸틴의 입지는 줄곧 하락세였으며 무소불위의 KGB 역시 과거의 위엄을 잃어가고 있었다. 모스크바 본부, 제1총국 본부의 한직을 사양하고 KGB 레닌그라드 지부로 돌아온 뒤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서 위장신분으로 근무하던 푸틴은 자유선거로 선출된 신임 레닌그라드 시위원장(시장) 아나톨리 소브차크[]를 만나면서 정보업계를 떠나 민간에서 그를 따르기로 하고 KGB에 사표를 제출한 뒤 출근도 안 했지만 정작 레닌그라드 지부와 본부에서는 푸틴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푸틴은 소브차크의 보좌관으로 들어가면서 KGB 윗선에는 '불온한 정치신인과 함께 일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겠다.'라고 제안을 한 뒤 작전을 승인받고 KGB와 시위원장 사무실에서 동시에 월급을 받아 챙겼다. 게다가 소브차크와 만났을 때 자신이 KGB 요원이라고 밝혔지만 정작 소브차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오히려 푸틴에게 자기 편인 척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겠고 일하기 쉽지 않다고 속내를 털어 놓으며 하소연을 했을 정도로 소브차크의 주변 인물들은 부패해 있었고 차후에 여러 스캔들을 터트리게 된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한 부분이 푸틴에게는 신의 한 수가 된 셈이다. 2018년에는 그의 슈타지 신분증이 발견됐다.

2006년 새로 완공된 러시아군 정보총국 GRU(Glavnoe Razvedyvatel'noe Upravlenie) 본부를 방문했을 때 스테츠킨 기관권총을 쏴 보는 푸틴. KGB 출신이라 그런지 사격 자세도 상당하다. 사진을 보면 기관권총임에도 개머리판 없이 사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동독 드레스덴 지부로 보고되는 각종 정보들을 종합하면서 서독 및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심해지는 경제력, 기술력 격차로 내부 개혁의 불가피성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드레스덴 지부에 보고된 1급 정보를 가공한 뒤 KGB 본부에 보냈지만 산업이 정체된 탓에 그 정보를 소련의 기술로 구현하지 못해 결국 폐기 처분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이미지 구축을 위해 자주 이런 쪽으로의 이미지를 어필하는 홍보 사진이나 영상물을 간간이 공개하고 있다. 야외에서 웃통 까고 캠핑하는 모습이라든지, 아래의 비행기 조종이나 무술 등등. 지난 대선 때는 폭주족처럼 오토바이를 끌고 오는 퍼포먼스를 하였는데, 당시 언론보도에 의하면 이젠 좀 식상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러시아인들도 상당수이다. 여담으로 푸틴이 걷고 있는 영상을 보면 왼손만 평범하게 움직이고 있고 오른손은 근육 병이라도 생긴 거 아닐까 싶을만큼 몸에 밀착해 거의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KGB 사복 요원들이 언제든지 사격을 할 수 있도록 받은 훈련 때문이라고 한다. 이른바 gunslinger gait(총사 걸음걸이)라고 부르는건데, KGB에서 은퇴한지 오래되었지만 직업병이 몸에 밴 듯하다. 관련 가디언지 기사(영문) 다만, 푸틴은 KGB 내에서도 행정 업무만 봤던 사람이며, 아래 언급된 것처럼 구소련 붕괴 직후에는 택시 영업까지 했던 인물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블랙 요원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랬던 그가 아직까지도 총사 걸음걸이를 유지한다는 것은 자신의 KGB 이미지를 정치적으로 사용할 뿐이라는 의견이 있다.

구소련이 붕괴된 직후 생활고로 무허가 택시 영업을 했다고 한다. 그때를 생각하면 본인도 불쾌하다고 하면서도 맞다고 인정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그의 이미지 선호도가 줄어들면서 이 경력은 행정병, 운전병이라고 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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