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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에 대해알아보자

뤼케 2022. 12. 1.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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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전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주석. 중화민국 장쑤성 양저우 출신. 1세대 마오쩌둥-저우언라이, 2세대 덩샤오핑 등에 이은 중국의 3세대 지도자로 분류된다.

퇴임 이후 후진타오 시대까지 중국 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시진핑 독재 체제가 된 2018년 이후로는 전직 국가원수 예우만 받고 있다. 그러나 장쩌민, 후진타오 주석 시절과 2010년대 중후반 이후의 중국의 스탠스나 상황이 워낙 달라진데다, 후임이 된 시진핑이 주석 임기제를 깨고 종신 집권제를 꾀하는 등 극단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후임인 후진타오와 함께 다시금 재평가되고 있다.

2022년 11월 30일 백혈병 투병 도중에 향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장쩌민 초기 약력


중화민국 장쑤성 양저우 출신. 본적은 장시 성이라고 한다. 삼촌이자 양아버지인 장상칭은 중일전쟁 때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그런데 친아버지 장시쥔은 왕징웨이 정권에서 복무한 한간이라고 한다.

1937년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을 직접 겪었다고 한다. 공부를 아주 잘해서, 처음에 국립중앙대학[에 들어갔다가 일본군 지배 치하에 있던 상하이교통대학으로 전학을 했다.

장쩌민 집권 기간

전반적으로는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가리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라는 덩샤오핑의 노선을 이었고, 1997년부터는 자신감을 얻어 "대국으로서 책임있는 자세를 가진다"라는 식의 '유소작위(有所作爲)', 즉, 필요한 역할은 한다로 나아갔다.#[]

최고직인 국가주석(政)에, 중국 공산당 총서기(黨)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軍)까지 겸임한 최초의 인물. 이전의 국가 주석은 상징적인 자리로 리셴녠, 양상쿤이라는 당 원로가 맡았고[], 총 서기는 당의 최고 직함이 된게 공산당 중앙위 주석이 폐지되며 분리되어 나온 1982년부터이므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계승한 셈이며, 군사적 자리인 군사위 주석만 덩샤오핑을 계승한 셈이다. 이 자리는 모두 후진타오에게 계승된다.

다만 중국에서 최초로 당-정-군의 권력을 모두 장악한 인물이라는 건 사실이 아닌데, 일단 장쩌민은 정부의 최고위직인 국무원 총리를 겸임한 적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이 당 주석,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국무원 총리를 역임했기 때문에 그 타이틀은 장쩌민이 아닌 화궈펑이 된다. 어차피 덩샤오핑은 저런 공식 감투가 없어도 충분한 권위가 있었던 것이다.

90년대 중반 차오스(喬石, 중앙 정치국 위원, 서기처 서기 - 1980년대 이래 당시 당내 권력 3위)가 그의 권력에 맞섰으나 1998년 이미 그는 재빠르게 권력을 장악했고, 차오스를 은퇴[]시켰다.[] 이는 쩡칭훙(曾慶紅)을 영입했던 게 절묘했기 때문이다. 쩡칭훙은 리펑과 연대하고 캐스팅 보터 리루이환을 지지시키며 후진타오기의 리커창 후임도 막아버렸던 "장쩌민의 제갈량"이었다.

집권 기간이 의외로 매우 긴데, 마오쩌둥(27년) 다음으로 2위(15년)을 집권했다. (시진핑이 실버크로스 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물론 기간 차이는 넘사벽. 이건 덩샤오핑이 81년에야 주석이 되어 8년 만에 자리를 물려준 탓이 크다. 거꾸로 말하면 천안문 사태가 아니었으면 이런 승계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임기 기간 대부분 동안 넘사벽 덩샤오핑이 배후에 있었다.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후계자로 세운 후로는 공식적으로는 모든 지위를 은퇴하고 평당원으로만 머물러 있었으며, 언론 노출도 거의 없이 모든 정무를 장쩌민에게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막후에서는 엄청난 권위로 다른 보수파 당 원로들 및 장쩌민의 경쟁자들의 반발을 제압하면서 장쩌민을 밀어주었다. 1992년 노태우 정부 당시, 북방 정책이 결실을 맺어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방중해서 장쩌민만 회동한 것을 가지고, 일부 한국 언론이 왜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을 만나지 못했냐고 비판 기사를 썼는데, 당시 덩샤오핑은 형식상 아무 직함 없는 평당원이었기 때문에 정상과 만나는 것은 격이 안맞는 일이었고,[] 노태우뿐 아니라 다른 외국 인사들도 덩샤오핑이 아니라 장쩌민을 만났으며 이후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한 이후에는 장쩌민이 진정한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덩샤오핑이 1992년 "개혁 개방만이 살길이다"라고 강조한 남순 강화를 할 정도로 1990년대 초반까지는 공산당 내의 보수파의 반발이 심했고, 마오쩌둥의 유산이 중국 사회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으나 장쩌민 시절에는 완전히 이를 청산하고 중국이 개국되었다. 즉 확실하게 개국된 중국은 바로 이 장쩌민의 시대에 열렸다. 주식시장과 코카콜라, NBA 중계,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개방. 한국과의 수교도 그의 시대에 있었다(1992년). 최초 방한(김영삼), 중국의 실권자로써는 두 번째 방미[](빌 클린턴),[] 최초 방일(오부치 게이조와 함께 # 당시 기사) 등 진기록이 넘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라고 집권 당시에는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이덕에 당시 재임 중이었던 빌 클린턴과 사이좋게 지낸 편이였다.

2000년 8월 말에 중국의 휴양지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미국 CBS의 시사프로 '60분'에 출연해 저널리스트 마이크 월러스와 인터뷰를 했는데 통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미국 기자와 대화할 정도로 능통한 영어 실력을 보여주었다. 스스로는 중학교 때 영어를 배웠다면서 자신의 영어 실력에 대해 겸손해 하지만, 통역이 되기도 전에 직접 기자의 말을 알아듣고 즉흥적으로 답하며 때론 직접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 결코 영어 실력이 보통은 아니다.[] 게다가 천안문 6.4 항쟁 당시의 상황을 추궁하는 기자의 날카로운 질문에 시종일관 여유있는 태도를 보일 정도로 멘탈도 매우 강단 있는데, 특히 천안문 항쟁에 대한 재평가를 시사하는 발언까지 나와서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여하간 천안문 항쟁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겪은 직후 집권한 장쩌민에게 있어 사회 안정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필수 과제였다. 그래서 그는 중국 공안 이외에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를 확대 개편하였다. 사실상 한국의 전경 내지는 의경과 비슷한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이는 중국 내부의 사상과 자유를 탄압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장쩌민의 임기 중에 파룬궁 신도들을 잔인하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탄압하는 정책 역시 시작되었다.

임기 중 러닝 메이트인 국무원 총리는 리펑(李鹏, 전반기 5년)과 주룽지(朱镕基, 후반기 5년)[] 참고로 이들 모두 이과다. 이른바 삼개 대표 사상을 "주요 전략 사상", 쉽게 말하면 핵심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다

중국 공산당은
항상 중국의 선진 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社会生产力的发展要求;)
항상 중국의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文化的前进方向;)
항상 중국 대부분의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最广大人民的根本利益.)"

대강 정리하면 경제 성장, 문화 진보, 민생. 뒤에 보면 알겠지만 후진타오도 한 건 했다.

강유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는데, 강유는 姜씨고 장쩌민(江澤民, 강택민)은 江씨다. 한국어 위키 백과에만 있던 말로 지금은 사라졌다. 여담으로 전임자 덩샤오핑도 비슷하게 등애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는데, 장쩌민과 달리 덩샤오핑은 진짜로 등애의 후손이 맞다.

매우 강력한 권력을 가졌으나,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제외한 국가주석과 당 총서기 직을 2003년 후진타오에 넘기고 퇴임하였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를 남겼는데, 중공 중앙군사위 주석은 2004년까지 1년간 더 유지하면서 바로 군권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밀당인 셈인데, 상하이방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설이 많다. 상하이방은 주로 처음부터 당 조직에서 활동하는 공청단 파와는 달리, 여러 국영 기업체에서 실적을 올려서 관리로 전직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장쩌민 자신도 국영 자동차 회사가 출세의 시발점이었다.), 이재에 밝은 면이 있지만 그만큼 비리의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반 부패 단속에서 걸리는 인물들이 많았다.

장쩌민 퇴임 후

후진타오 옆자리를 차지한 장쩌민이 현임 지도자 같은 인상을 보여준다.

2011년 7월 6일, 사망설이 나돌았었다. 하지만 다음 날, 바로 오보였다고 공식 발표했고, 이 방송을 낸 aTV 사장은 사임했다. 병원에 입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퇴원했다고 한다.

2012년 들어서는 공식 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다가, 2012년 11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진타오 주석 바로 옆 자리를 배정받아 차기 지도자 시진핑보다도 높은 의전서열로 그의 권력이 아직 막강함을 보여주었으며, 실제 전국대표대회 결과 구성된 신임 중국 지도부도 그가 이끄는 상하이방과 협력 관계인 태자당 소속 시진핑이 당 총서기 및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후진타오로부터 물려받았으며,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직도 대부분 상하이방과 태자당 소속 인물들이 물려받았다. 도올 김용옥의 견해에 의하면, 덩샤오핑이 장쩌민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기는 했지만, 장쩌민이 워낙 권력 의지가 강하고, 주위에 패거리를 잘 만드는 경향을 우려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언가 제어책이 없으면 종신 집권을 할 가능성을 우려해서 자기 생전에 이미 후진타오를 장쩌민의 후임으로 못박아 놓았다고 한다. 사실 후진타오는 재임 내내 장쩌민 또는 장쩌민 일파와 권력 다툼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후진타오의 공청단파와 장쩌민의 상하이방이 치고받는 동안 태자당에서 말석 시진핑이 집권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시진핑은 사실 태자당 내에서도 보시라이에 밀렸으나, 보시라이가 권력을 남용하다가 몰락하면서 태자당에서 선두에 나서고 결과적으로 집권까지 이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후진타오가 장쩌민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장쩌민의 후계자이자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의 정치생명이 끝나기 전까지 이야기다. 장쩌민에게 군사위 주석을 물려받은 후에도 파워게임에서 밀리던 후진타오지만 천량위를 부정부패 문제로 정치생명을 끊은 것을 기점으로 여러 상하이방 인물들을 몰아내며 최고지도자다운 파워를 보여주기도 했으며 후진타오는 시진핑에게 군사위 주석직을 바로 넘겨주는 대가로 장쩌민과 동시에 정치에서 물러나는 물귀신 작전을 펼쳤다. 이 거래가 성사하자, 시진핑은 5세대 1기 상무위원들 7명중 4명이나 상하이방이었지만 이들을 집요하고 철저히 몰아냈다. 특히 상하이방의 중추이자 중국에서도 손에 꼽는 막강한 권력자 저우융캉 정법위 서기를 베이징 친청 교도소에 보내 텃밭에서 채소나 기르는 신세로 만들며 시진핑이 장쩌민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

한마디로 시진핑 시대에서 장쩌민은 실질적 영향력이 없다고 봐도 좋다. 게다가 상하이방은 본질적으로 1970-80년대 장쩌민과 상하이 지역에서 일한 사람들이 주축이며, 장쩌민이 주석으로 등극한 이후에는 신진 세력들이 충원되지 않으면서 시간이 갈수록 노장화되어 은퇴하자 당내 세력이 약화되었다. 상하이방의 가장 젊은 세대가 시진핑과 비슷한 1950년대생이다. 여기에 기업체 출신이 많아서 부패 단속에 걸리는 자들이 많았고, 시진핑은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반부패운동을 벌여 상하이방의 핵심 인물들을 상당후 축출했다. 젊은 세대가 없는 계파 특성상 시진핑 이후에는 소멸되는 것이 시간문제일 뿐이다.

2015년 8월 24일, 해외의 반중 화교 언론 보쉰[]과 파룬궁 계열 대기원시보에서 장쩌민이 부정부패 등의 혐의로 전격 체포되었다는 가짜뉴스를# 보도했으나, 승전 70주년 전승절 열병식에서 후진타오 전 주석과 함께 참석한 것이 생중계로 잡히면서 거짓임이 드러났다. 아들 장몐헝의 체포설도 반중언론이 지어낸 가짜뉴스며, 정부가 검열하는 바이두 백과에 멀쩡히 현재 상하이 과기대 총장으로 재임하고 있다고 나오고 있다. #

2019년 10월 1일 70주년 국경절(건국 기념일) 기념 열병식에도 보좌관의 부축을 받으며 시진핑, 후진타오와 함께 천안문 망루의 주석단에 나왔다. 후진타오가 집권시기보다 나이가 많이 들고 백발이 되어서 조금 덜 드러났지만, 90대의 나이 때문인지 혼자 걸을 수 없을 만큼 심히 노쇠해진 모습을 보였다. 열병식 직후 실시된 대규모 민간 퍼레이드에서 자신의 대형 초상화가 지나가고 광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자신의 지도자 시절 모습이 비춰질 때도 별 반응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래도 염색의 힘을 빌려서 그런지 90이 훌쩍 넘은 사람치고는 아주 동안인데, 염색을 안한 후진타오보다 젊어 보인다는 평도 있을 정도다. 2021년 7월 1일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100주년 기념 행사에 후진타오 전 주석은 참석했지만, 장쩌민은 건강상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이후에 2022년 96세 생일잔치를 맞아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홍콩 명보에 올라왔는데, 확실히 노쇠함과 연로함이 드러난다.#

다만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 불참하게 되면서 자신의 후임인 후진타오의 불명예 퇴장은 보지 않게 되었다. 여담으로 자신의 계파인 상하이방 및 후임자 계파인 공청단 소속의 국무위원은 7인방에서 배제되면서 시진핑 주석 중심의 시자쥔 독주가 확실해져 정치 권력의 완전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장쩌민 사망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30일 오후 12시 13분, 상하이에서 백혈병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다. 향년 96세. # 사망 원인은 백혈병과 다발성 장기 부전이라고 한다. # 실로 오랜만에 장의위원회에 해당하는 치상위원회(治丧委员会)가 구성되었으며, 시진핑이 장의위원장에 해당하는 주임위원을 맡았다. 명단은 여기로

전근대의 군주들을 포함해 역대 중국 대륙의 지도자들 중에서 덩샤오핑을 넘어 가장 장수한 인물이 되었다.[]

사망 보도 이후 신화사, 중국중앙전시대 등 공공기관 및 바이두 같은 민간 웹사이트들이 메인 페이지를 흑백으로 갈아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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